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별세...얼마나 힘들었나
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55)씨가 27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고인은 이날 오후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서 아내와 함께 산행을 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LA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 이하 체급에 출전해 한쪽 눈이 퉁퉁 부어오르는 부상을 입고도 투혼을 발휘하며 결국 금메달을 따내 국민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그가 따낸 금메달은 당시 한국 대표 선수단의 대회 첫 금메달이자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양정모(64)에 이은 두 번째 금메달이었다. 김원기씨의 금메달은 한국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금메달을 따내지 못하고 있다가 8년만에 다시 조국에 금메달을 안겨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의 '세대'가 그랬듯 그 또한 가난한 집안에서 오로지 운동만 하면서 일궈냈던 성공 스토리였기 때문에 국민들도 그에게서 많은 힘을 얻었다.
귀국 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던 고인은 1986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후 영업사업으로 시작해 10년 넘게 보험회사를 다녔고, 이후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김씨는 1989년 전남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8년이 지난 2007년 다시 학교로 돌아와 4학기 만에 경희대에서 체육학 박사를 따냈다.
고인은 생전 전남 함평군 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아 후배 양성에 힘을 쏟아왔다. 김원기씨는 생전 자신처럼 운동밖에 몰라 사회적응을 하지 못한 후배들을 돕고자 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까운 사람의 빚보증 선 게 잘 못되는 바람에 전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한 동안 계속 그 빚을 갚아야 했고, 막상 갈 데가 없어서 선배가 하는 세차장 등에서 수개월동안 일을 하기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원기는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교도소의 재소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회생활 중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재소자들과 만났고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활동을 시작,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다는 설명도 더했다. 그 후 김원기는 ‘도전, 나는 나를 넘어섰다’란 주제로, 영등포 ·안양·인천·춘천 등 한해 수십여 차례의 전국 교도소 순회 강연을 해왔다. 하지만 김원기씨의 인생 금메달 도전은 안타깝게도 치악산에서 갑자기 끝이 나고 말았다.
유족으로는 아내만 있고, 자녀는 없다. 빈소는 이대목동병원, 발인은 31일 오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온라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