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야구 봉황대기 결승전 오점 남긴 심판 최악의 오심 사태

2017-09-02     임석우


▲ 최악의 오심 순간. 충암고 양우현의 발이 3루 베이스에 이미 닿았으나 야탑고 3루수의 글러브는 아직 양우현의 몸에 태그하지 못하고 있다.



고교야구가 한창 인기있던 1970~80년대 봉황대기 고교야구는 4대 메이저 대회로 불렸다. 그 중에서도 지역 예선없이 모든 팀들이 참가하고, 1, 2회전만 먼저 대진 추첨을 한 뒤 32강 이후부터는 32강, 16강, 8강, 4강 팀이 결정되면 그때마다 대진 추첨을 진행해 흥미를 끌었다. 또 여름방학 때 대회가 열려 열기를 더했다.


1971년 창설돼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기보다는 후발주자였지만 봉황기는 ‘봉황대기’로 불릴만큼 4대 메이저대회 중에서도 최고봉이었다. 특히 성준·류중일의 경북고와 김건우·박노준의 선린상고가 맞붙은 1981년 결승전은 드라마틱한 승부로 지금도 70~80세대에게는 ‘전설’로 남아 있다.


지난 9월 1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45회 봉황대기 고교야구 충암고와 야탑고의 결승전은 근래 보기드문 명승부였다. 야탑고 이승관과 충암고 김재균의 좌완 투수 대결은 어느 프로 경기 못지 않게 수준높았다. 야탑고는 이승관-안인산-신민혁이 이어던지며 어린 선수들답지 않게 숱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충암고 김재균도 1회 1사 후 등판해 7과 ⅔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삼진을 9개나 잡는 투혼을 보였다.


이 경기는 야탑고의 2-1 짜릿한 승리로 끝났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유가 있다. 바로 강신우 3루심의 결정적인 오심과 그 이후에 보인 태도 탓이다. 충암고는 1-2로 뒤진 7회초 선두타자 양우현이 3루 땅볼을 치고 상대 악송구 때 3루까지 내달렸으나 태그아웃됐다. 그러나 경기를 중계한 아이비(IB)스포츠 중계 화면에는 명백한 세이프로 나타났다.(사진) 충암고 이영복 감독이 강하게 항의했지만 비디오 판독이 없는 고교야구에서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심판도 사람이니 오심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 태도가 더 문제였다. 강신우 3루심은 이 감독과 언쟁을 벌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원재 1루심이 다가가 강 3루심을 만류했지만 양 팔로 뿌리치는 등 추태를 부렸다. 이 경기를 중계방송하던 구경백 위원이 “심판이 흥분하면 안된다. 강신우 3루심 이러면 안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정찬우 캐스터도 “방송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환기시켰다.


심판이 오심을 할 수도 있다. 경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 오심마저도 극복하는 게 또한 야구다. 하지만 명백한 오심을 저질러놓고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역정을 내는 행위는 최악의 추태다. 심판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 어깃장을 놓으며 부인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심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강 3루심의 추태는 자라나는 고교생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오심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처법이 최악이었다.


한편 포털사이트 인터넷 중계방송 댓글에는 강 3루심에 대한 팬들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한 누리꾼은 “멀리서봐도 명백한 오심인데 심판이 뭘 잘했다고 오히려 이성을 잃고 흥분한다”며 혀를 찼고, 또다른 누리꾼은 “심판 오심 때문에 충암고 우승이 날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밖에도 원색적인 용어로 강 3루심을 비난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무사 3루라는 절호의 동점 기회를 날린 충암고는 다음 타자 김동호가 곧바로 중전안타를 쳤다. 충암고로선 땅을 칠 노릇이었다. 오심 하나가 이날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충암고는 이 대회에서 1977년, 1988년, 1995년, 2007년 등 4차례 정상에 오르며 이번에 우승했다면 북일고와 함께 이 대회 최다 우승(5회)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봉황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결승전 결정적 오심은 ‘축제’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 아울러 대한야구협회와 주최사인 한국일보사는 심판의 자질 향상이라는 그보다 더욱 큰 숙제를 남겼다.



▲ 1980년대 최고의 고교야구 스타였던 선린상고 박노준 선수(현 스포츠 해설가)가 81년 열린 봉황대기 경북고와의 결승전에서 발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박 스포츠 해설가는 그때를 회상하며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병원밖에 여성 팬들이 밤늦게까지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고 말했다.



임석우 인턴기자 rainstone@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