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아저씨 머리카락 광탈된 사연
게으른 중년 아저씨들이 매달 빠지지 않고 하는 ‘루틴’중의 하나가 이발이다. 한달에 한번씩은 이발소나 미용실로 향한다. 동네 미장원부터 유명 미용실과 호텔 이발소까지 두루 섭렵해본 에디터는 그냥 단골집이 생기면 그곳에만 다닌다. 언제부터인가 명동의 한 미용실을 매달 찾곤 했다. 가격도 15000원으로 적당하고 무엇보다 내 취향을 잘 아는 미용사의 ‘불립문자’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그곳에만 다녔다. 그런데 그 친절하고 상냥하던 미용사가 다른 곳으로, 그것도 너무 멀리, 가버린 뒤부터 나는 떠돌이가 되었다.
운수 좋게 ‘좀 다듬어 주세요’ 한마디만 하면 ‘쿵’ 하고 알아듣고 내 울퉁불퉁 머리통 형태와 적당하게 어울리게 ‘다듬어’ 주는 그런 센스만점 미용사를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벌써 몇 년 째 나는 명동 시청 근처의 미용실을 전전하고 있다. 사실 미용실처럼 ‘불통’이 이어지는 곳도 없다. 손님이 ‘적당하게 쳐주세요’ 하면 그것에 그 손님의 까다로운 취향이 모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귀 밑 2센치미터에 뒷머리는 바리깡으로 하지 마시고...’ 등등의 디테일을 설명하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손님은 그 미용사의 센스만 믿고, 미용사는 손님의 첫인상과 성향 취향 등을 단박에 알아본 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육감만 믿고 가위를 들이댄다. 결과는 복불복이다.
OO클럽은 한때 최고의 매출액을 기록한 이.미용 프랜차이즈 업계의 선두주자였다.
지금까지 단골집이 안 생긴 이유도 ‘딱 여기다’라는 느낌적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다. 대충 명동의 미용실을 간판만 보고 들어갔다가, 후회막급을 외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머리를 깎는 시기도 대충 한달이 됐거나, 기분이 꿀꿀할 때 기분전환 삼아 머리를 깎는다. 오늘이 그런 날. 밀린 일을 앞두고 심기일전 삼아 미용실을 찾아나섰다. 사무실을 방배동 근처로 잡은 뒤 이곳에서 주로 식사를 하는데, 머리는 처음 깎으러 나섰다. OO헤어숍 아니면 유명한 헤어디자이너 미용실 등의 간판을 보다가 문득 눈에 OO클럽이 들어왔다. 간판 밑에는 ‘8000원’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써져 있었다.
‘흠, 어차피 머리야 가위로 깎는 거 저기라도 별 차이가 있겠느냐’
여느 미용실처럼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손님들로 북적였다. 눈에 띄는 건 나처럼 중년 아저씨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흠... 이 말은 취향보다 그냥 깎기에만 집중하는 아저씨들의 단골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집과 달리 안경을 두는 선반 위에는 잔 머리카락이 사방에 퍼져있었다. 깨끗한 곳을 찾다가 포기하고 머리카락 위에 안경을 두고 앉았다.
‘앞에는 좀 길게 하고, 뒤 옆은 단정하게 해주세요’
이 짧은 말에 내 취향이 모두 담겨 있었고, 나는 속으로 ‘아 제발 내가 말한 것의 200%를 알아들으시고 예쁘게 제 취향대로 깎아주세요’ 하며 기도했다. 그런데 첫 가위질부터 범상치 않았다. 가위손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머리카락을 팍 팍 솎아내는 것이었다. 뭔가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8000원에 담긴 ‘대충 그냥 팍팍’의 내 첫인상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구레나룻을 남길까요?’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질문이었지만, 난 그분의 가위질을 믿고 ‘네, 그냥 어울리게 알아서 해주세요’ 했다. 그렇게 가위질이 이어졌고 난 뭔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시간이 20분 정도로 매우 짧다는 것이다. 명동의 일본인이 운영하던 미용실도 다닌 적이 있었는데, 이곳을 가지 않는 이유는 한번 앉으면 커트를 1시간도 넘게 한다는 것이었다.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지만,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정서와는 맞지 않아 발길을 끊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앉자마자 한 20분이면 바로 상황 끝이었다.
‘드라이 나중에 해주나요?’
‘아니요, 손님이 직접 머리 감고 드라이도 해야 해요’
‘아, 그렇구나...’
나는 머리를 정성스럽게 감고, 거울을 보았다. ‘흠...’ 갑자기 느낌이 싸~ 했다. 생각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없었다. 옆머리는 해병대 돌격형 머리처럼 군기가 바짝 든 채 치켜올라가 있었다.
‘아, 여기가 아니었어’
지난 2004년 개봉했던 오지명 주연의 영화 '까불지마'의 한 장면
잠깐 조는 사이, 주인은 시원하게 내 머리를 밀어놓았다. ‘단정하게’를 ‘짧게’ 알아들었던 거 같다. 대부분의 미용사들은 중년 아저씨들은 영구머리처럼 바짝 치켜올려 짧게 깎지 않는다. 중후한 멋이 날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내 머리는 곧 입대를 앞둔 청년의 군기 든 모습이었다.
‘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계산대로 향하는데 그곳에 큼지막하게 ‘현금으로 계산 부탁드립니다’라고 씌어있었다. 순간 나는 지갑에 든 현금을 무시하고 카드를 꺼내들었다.
내 소심한 복수였다. 현금 8000원이면 수수료 제하면 얼마 남지도 않기에 아마 주인이 현금을 달라고 크게 써놓았던 거 같았다. 나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쿨하게 카드를 내밀고 결제한 뒤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느낌은 들었지만, 역시 이곳은 아니었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나는 OO클럽의 요금이 싸기 때문에 내 머리 스타일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고 원망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그 미용사도 좋은 기술을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8000원에는 시간과 경비를 너무 따진 나머지 손님의 취향을 더 오랫동안 헤아릴 ‘혜량’의 서비스는 없는 것 같다. ‘싼게 비지떡’이란 말을 나는 그다지 좋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세계 최첨단의 ‘가성비 국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가성비 좋은 OO클럽을 가지 않는 중년 아저씨들이 많은 이유는... 그런 싼 가격의 미용실에는 ‘척 하고 말하면 쿵 하고 알아듣는 센스좋은 미용사가 없다’라는 경험칙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싼 것도 결국 시간과 정성 앞에는 무릎을 꿇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OO클럽 문을 나섰다.
최근 들어 한남동 홍대 등지를 중심으로 고급 남성 헤어숍인 '바버숍'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상식’은 요즘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블레스 바버샵’ ‘헤아’ ‘낫띵앤낫띵’ 등과 같은 바버숍(barber shop)과 맥이 닿는다. 바버숍은 남자의 머리털을 깎고 다듬어 주는 이발소다. 하지만 멋을 좀 부릴 줄 아는 남성들이라면 이젠 미용실 대신 바버숍으로 발길을 돌린다. 수건을 말리는 한가로운 풍경의 동네 이발소가 아닌 세련된 인테리어와 고급 미용 기술로 무장한 바버숍이 한남동 압구정동 홍대를 중심으로 최근 들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나도 미용실 떠돌이 신세를 그만두고 싶다. 다음 편에는 중년 아저씨의 바버숍 체험기를 올려보겠다. 기대하시라~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덧붙이는 말)
나는 결코 OO클럽의 미용기술이 떨어지거나 서비스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혼자서 머리를 감을 수 있고 드라이도 하는 등 ‘효율적인 시스템’이 싼 가격을 유지하는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 머리가 짧은 순간에 광탈됐다는 느낌이 들어 셀카로 내 머리를 촬영하려고 했다.
평소보다는 훨씬 짧게 처리된 옆모양에 멘붕이 온 에디터. 후배에게 그 인증샷을 부탁했다.
“지금 내 차 찍고 있는 거에요?”
OO그룹 회사 점퍼를 입은, 웬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아닌데요, 저 찍고 있었는데요”
대답을 하긴 했는데, 좀 불쾌했다.
“아저씨 차를 제가 왜 찍어요”
“아니면 됐어요”
문을 열고 그 차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왜 저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차는 인도에 주차돼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각종 앱으로 기초질서를 어긴 사람들이나 차량을 공무원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게 많이 보편화 돼 있다. 불법주차도 사진을 찍어 간단하게 앱에 올리면 바로 신고가 된다. 아마 그 운전자도 내가 자신의 차량을 불법주차로 신고하려 했다는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오해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