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길을 걷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최근 행보를 보면 2002년 대선 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당시 대선 정국은 독보적 1위 이회창과 그를 추격하는 반 이회창 진영으로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독보적인 1위 주자였던 것만큼 비토세력도 많았다. 하지만 이회창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아니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정국을 돌파해나갔다. 주변의 소통 요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의 대세론만을 믿었다. 결과는 패배였다.
현재의 대선 정국은 독보적인 1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반 문재인 세력으로 재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02년 대선정국을 상당히 유사한 체제로 흘러가고 있다. 이회창이 당시 그랬던 것처럼 최근 문재인의 행보를 보면 ‘부자 몸조심’의 기류가 곳곳에서 읽혀진다. 시간만 지나면 당선은 떼논 당상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런 행보는 기존 지지세력의 결집은 가져올 수 있지만 50대 중도층(한국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충실히 했던)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잡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의원은 이에 대해 “중도층 유권자가 안심하고 표를 줄 수 있는 후보가 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현재 문재인의 언행을 보면 ‘이대로 가더라도 기존 세력만으로 이길 수 있다’는 표 계산이 끝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개헌과 관련한 대통령 임기단축이다. 박원순 이재명 등 유력주자들은 개헌을 고리로 한 임기단축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대선 후 개헌을 하려면, 2022년까지인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총선이 예정된 2020년으로 줄여야 한다는 게 임기 단축론자들의 주장이다. 김종인 박원순 이재명 등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 임기를 2년 반만 하겠다는 것이다.
문재인으로서는 ‘다 된 밥에 코빠뜨리는 격’인 임기단축이 달가울 리 없다. 문재인은 이에 대해 “임기단축은 개헌 같은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개헌을 매개로 한 정계개편, 제3지대, 이합집산 이런 얘기들은 전부 다 정치적 계산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며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바로 여기에 문재인의 대세론 함정이 어른거린다. 이 발언은 자칫 ‘내가 당선 확정적인데 왜 임기단축을 해야 하느냐’는 탐욕의 일단을 드러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물론 정략적인 개헌 발상은 그 성사가 불투명하다. 하지만 1987년 체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정치지형을 모색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는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이것이 인위적인 정계개편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선뜻 그것을 추진하고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는 게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 선언 초기에 여론이 나타난 바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전 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찬성이 41%로 38%의 반대를 앞섰다. 정계개편 등과 같은 불순한 변수가 없는 한 개헌에 대해 국민들이 대체로 공감한다는 것이다.
문재인은 개헌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지금 논의되는 개헌들은 다들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얘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 민심하고 동떨어져 있다”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럴까. 개헌은 향후 정계개편의 퍼즐을 맞춰줄 마지막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재인으로서는 그것에 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개헌이 바로 ‘반 문재인 연대’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으로서는 이 개헌이라는 허들을 반드시 넘어야만 한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면승부를 펼쳐야 한다. 임기단축도 흔쾌히 받는 공격적인 수를 던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재인은 이미 ‘정부청사’에 마치 입성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섀도우 캐비넷’을 이야기 하고 집권 후 로드맵 작성에 골몰하고 있다. 김칫국을 빨리 마시면 뜨거워 전부 토해낼 수도 있다. 1위 후보가 선제적으로 이슈를 만들어 나머지 주자들을 끌고 나가야 한다. '부자'였던 이회창이 몸조심만 하다가 막판에 고꾸라진 것을 되짚어봐야 한다. 대세론은 필패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