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의 당사자인 김훈 중위가 숨진 지 19년 만에 순직으로 인정받았다.
한겨레는 국방부가 지난 8월 31일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열어 1998년 군 복무 중 의문사한 김훈(당시 25살·육사 52기) 중위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국방부는 이런 사실을 9월 1일 오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은 1998년 2월24일 정오 무렵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지하벙커에서 근무하던 김훈 중위가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최초 현장감식 두 시간 전에 이미 자살보고가 이뤄지는 등 부실한 초동 수사 때문에 이후 타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낸 군은 최초 발표 이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국방부는 육군이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합동으로 진행한 1차 수사(1998년 2월24일~4월29일)는 물론, 육군본부 검찰부의 2차 수사(1998년 6월1일∼11월29일),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설치된 특별합동조사단의 3차 수사(1998년 12월9일∼1999년 4월14일), 2012년 3월22일 총기 격발실험 등에서 일관되게 ‘김훈 중위가 자신의 권총을 이용해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2006년 12월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초동 수사가 잘못돼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고 판결했다. 3년간 사건을 조사했던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2009년 11월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국민권익위원회도 국방부와 합의해 2012년 3월22일 총기 격발실험 등 쟁점 사안들에 대해 재조사를 진행한 뒤 “김훈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보기 어렵다”며 “순직으로 인정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했다.
특히 권익위는 당시 격발실험 결과에 토대해 김 중위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오른손잡이였던 김 중위의 왼쪽 손바닥에서만 화약이 검출됐는데, 국방부가 추정한 김 중위의 자살 자세에 따라 발사실험을 한 결과 실험자 12명 중 11명의 오른손 손등에서 화약흔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권익위는 2012년 8월 화약흔 실험결과와 함께 벙커 내 격투흔적이 있고, 김 중위 관자놀이에서 총구에 눌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자살로 결론짓기 어렵다”며 “김 중위의 순직을 인정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했으나, 국방부는 5년여 동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4월 또다른 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의 당사자인 허원근 일병도 사망한 지 33년 만에 순직으로 인정받았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인 예비역 중장 김척(74)씨는 “다른 군 의문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 피처링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GP에서 머리에 총상이 있는 김훈 중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국방부는 김훈 중위의 사망 원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훈 중위의 아버지는 믿을 수 없었다. 군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스스로 군인의 길을 걷는 김훈 중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훈 중위의 아버지는 재조사를 요구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당시 소대원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훈 중위는 자살할 인물이 아니었으며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사단장 표창까지 받았던 뛰어난 군인이었다. 따라서 자살 동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자살이라고 발표하였다.
게다가 김훈 중위의 옷을 재 감정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김훈 중위가 사망 당시 입고 있던 야전 상의 좌우측 어깨에서 무연 화약 성분은 검출되나 팔 부위에는 검출되지 않았고 좌우 손등과 손바닥에서는 화약 성분 검출 여부를 알 수 없기에 제시된 증거물의 시험 결과만으로는 발사자가 자신인지에 대해 논단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총이 발사된 거리에 대해서 노여수 박사는 김훈 중위의 경우 사입구가 밀착사의 형태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밀착사의 경우 화약이 사입구 안으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대부분이 밖에 묻어 있었으므로 접사가 아니라 약간 떨어져서 쏘는 근접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로 대부분의 총기자살 사건 중, 접사가 아닌 근접사로 사망하는 경우는 전체의 10분의 1도 안된다.)
이 외에도 사건 현장의 격투 흔적과 김훈 중위 몸의 부상의 흔적들, 시신 옆의 방탄모, 미 군의관이 시체 전체를 닦은 것(부검 전의 시체를 닦는 것은 자칫하면 증거가 훼손될 수 있는 심각한 행위다.) 등의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있었다.
이후 국회, 대법원, 국가권익위원회 등의 기관들의 조사를 통해 국방부의 발표대로 김훈 중위의 사망을 자살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국방부는 자살이라는 입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사건 재현을 위해 실시했던 실험 결과, 타살의 가능성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국방부는 비공개 처리해버리는 등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2012년 국가권익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을 인정하고 징병제 국가에서 군 내 의문사에 대한 책임은 국방부에게도 있다며 국방부에게 김훈 중위의 순직을 인정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족이 자살은 인정한다면 순직 처리해주겠다며 뻔뻔한 태도로 대응하였다.
결국 김훈 중위 사건은 국방부가 수사중에 저지른 각종 잘못과 조작, 진상 규명 방해 등으로 인해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의문사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김훈 중위의 사망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란 의혹들
1. 권총이 발사된 거리 : 권총 격발 시 흔들려 빗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꽉 대고 쏘는 '접사'를 하여 자살하지만, 김훈 중위는 '근접사'로 판명이 났고, 접사가 아닌 근접사로 자살을 하는 경우는 전체의 3%에 불과하다고 한다.
2. 손에 화약흔 미발견 : 맨손으로 권총을 잡고 쐈다면, 김훈 중위의 손에 화약 잔여물이 남아있고,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오른손잡이였던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는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왼손에 화상 및 잔여물이 발견되었다.
3. 총에 지문 미발견 : 김훈 중위는 사망 당시 맨손이었는데, 자살을 했다면 총에 지문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재조사에서 감식관이 분석한 결과 부분적으로 지문이 나왔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4. 제3자의 지문 발견 : 김훈 중위 사망 사건에 사용된 권총에 장전된 탄환에서 지문이 발견되는데 제3자의 지문이 발견되었고, 이 지문의 발견도 국방부 감식이 아닌 경찰청 감식을 통해 발견되었다는 점도 의혹 중 하나다.
5. 당시 발견된 권총의 진짜 주인 : 김훈 중위 사망 장소 주변에서 발견된 권총이 김훈 중위의 것이 아니라는 문서상의 기록이 발견되면서 더 문제가 불거졌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김훈 중위가 소지했던 총기 소지증의 총번과 실제 현장에서 발견된 총기의 총번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 현장에서 발견된 총기는 모 사병의 것이라고 한다. 국방부는 당시 김훈 중위가 총이 고장나서 다른 사람의 총을 가져갔다고 밝혔지만, 당시 수불증이 위조된 서류라는 증언이 나왔다.
6. 사망 장소의 격투 흔적 : 김훈 중위가 사망한 현장인 241GP 3번 벙커는 북쪽과 가장 근접해 있어서 벙커에 설치된 크레모아 격발기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였고, 하루 두 번 실시되는 전원투입 근무 때마다 소속 부대는 스위치를 감싸고 있는 나무 박스의 상태를 점검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부사관에서 즉시 보고하여 점검하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 당시 이 나무 박스가 부셔져 있었고, 김훈 중위의 왼쪽 손목의 손목시계 유리가 깨진상태로 발견되면서 자살이 아닌 격투 후 타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7. 시신 옆 의문의 방탄모 : 김훈 중위의 사망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총기 옆에 헬멧이 놓여있는데, 이후 사라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해당 논란에 대해 방탄모가 미군 군의관의 것으로 검안 당시 자신의 방탄모를 총기 옆에 벗어 두었다가 사진을 찍고 현장 검안 이후 돌아가는 길에 방탄모를 두고 온 것을 인지하여 운전병을 시켜 가져오게끔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사건 현장을 경비하던 육군 병사의 증언은 사건 현장 촬영을 위해 미군 하사가 계속 들락날락 했고, 미 군의관은 그 이후에 왔다고 하면서 애초 미군 군의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방탄모가 둔기로 사용되어 김훈 중위의 머리를 가격했을 것이란 가능성을 제기했다.
8. 김훈 중위 몸에서 발견된 부상 흔적 :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 찰과상이 발견되었고, 두정부의 상반부 가운데 피하조직에서 방사선 골절 및, 혈종이 발견되면서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9. 김훈 중위의 시체를 닦았다 : 김훈 중위 사망 당시 시체를 최초로 검안한 미군 군의관이 총상 부위를 포함한 시체의 전신을 닦아냈다고 한다. 군의관과 동행한 한국군 의무병도 증언했다고 한다. 부검 전 시체를 닦아내는 것은 증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본을 어기고 김훈 중위의 시체를 닦았다니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이 외에도 김훈 중위 소대의 부소대장이었던 김영훈 중사가 야간을 이용하여 20~30여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를 찾아가는 등 북한군 병사와 불법적으로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김영훈 중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 때문에 김영훈 중사가 북한군에 포섭되어 김훈 중위를 살해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무혐의 처리가 되었고, 이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진 않았다. 현재 김영훈 중사의 소재 파악도 불분명하다고 한다.
이런 의혹들이 가득한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은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게되었다. 2009년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와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재차 조사를 했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하게 단정 짓지 못하면서 진상규명 불능 결정이 나오게 된다.
이후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여러 방송과 언론에서 김훈 중위의 사망과 관련한 의혹들을 꾸준히 제기하면서 관심을 모았고, 최근에는 530GP 총기난사 사건이 다시 조명되면서 동시에 군 의문사 사건인 김훈 중위의 사망 사건도 다시 회자되었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은 한국 군 의문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동안 군 의문사는 군의 일방적 발표에 의해 사건은 흐지부지 되기 일쑤였고, 특수영역인 군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아 유가족들도 진실규명에 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훈 중위의 아버지는 육군 중장이라는 직책이었고, 이런 점은 그동안 터부시 되어 오던 군의 울타리를 허무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김훈 중위 부모의 끈질긴 진실 규명 의지가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다 방송사 주간지 등의 언론이 사건 규명에 지속적으로 매달려 진실의 끈이 이어지게 된 것도 19년만에 순직을 인정받는 데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김훈 중위 사건은 군 의문사에 대한 군 내부의 인식 전환점이 되었기를 바란다. 군은 폐쇄적인 조직 특성과 군사기밀이라는 보호막에 가려져 군 의문사에 대한 진실규명 인식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순직 처리를 계기로, 군 의문사는 절대 덮여지지 않고 언젠가는 그 진실이 드러나 책임자가 처벌을 받는다는 인식을 군이 분명히 가져야 한다.
또한 아직도 사건의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다. 김훈 중위가 자살하지 않고 순직했다는 것뿐이다. 순직했다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이유로 직무중 사망했는지 그 진실을 규명해내야 한다. 순직 인정, 이제 그 진실규명의 시작이다. 김훈 중위의 영면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