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솔직해지는 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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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솔직해지는 걸 보고 싶다"
  • 성기노
  • 승인 2017.09.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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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문제를 파격적으로 다뤄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전 연세대 교수이자 소설가인 마광수씨의 사망은 문단과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묵시적 타살'이라는 말도 나온다.


소설이 파격적이었던 것만큼이나 그의 인생도 곡절이 많았다. 1951년생인 마 전 교수는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 한 권으로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선다.


'가자 장미여관으로'에 이어 1991년 출간된 소설 '즐거운 사라'는 예술과 외설,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왔다.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는 이에 대해 "건강한 성이야말로 인간을 유지시켜 주는 생명줄이다"라며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외쳤다. 하지만 '쓰레기 소설'이라는 대중들의 차가운 비난 앞에서 마 전 교수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소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 판정을 받으면서 구속됐고 교수직에서도 물러나는 수모를 겪었다. 검찰에 구속된 마씨는 1992년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95년 3심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그해 연세대에서도 해직됐다. 당시 '즐거운 사라'를 출판한 청하출판사 대표 장석주(62) 시인은 "이 사건이 마광수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면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앓으며 약을 복용할 정도로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그의 구속은 한 자유인의 생각을 '구속'하는 권력의 타격이었다. 한 문화평론가의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대할 것인가, 적어도 또 다른 마광수를 만들어선 안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라는 지적은그 그래서 타당한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특별사면·복권됐고, 연세대에도 복직했지만 풍파는 끊이지 않았다. 마씨는 윤동주 시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따 1979년 28세 나이로 홍익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고 1984년부터 모교인 연세대 강단에 섰다. 2000년 '연구 실적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재임용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2006년엔 '즐거운 사라' 본문과 남녀의 성기가 노출된 사진 등을 본인의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음란물 시비를 낳으며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마 전 교수는 "배신감에 죽고 싶다"거나 "음란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며 좌절감을 토로했다.


작년 8월 정년 퇴임 후 우울증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직 경력 탓에 자격을 잃어 퇴임 이후 명예교수가 될 수 없었다. 퇴임 당시 "줄곧 국문과의 왕따 교수로 지낸 것, 그리고 문단에서도 왕따고, 책도 안 읽어보고 무조건 나를 변태로 매도하는 대중들, 문단의 처절한 국외자, 단지 성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따라다니는 간첩 같은 꼬리표. 그동안 내 육체는 울화병에 허물어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는 심경을 밝혔다.


작년 10월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 인터뷰에서 "요즘 너무 우울해서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어디에서든 강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기회가 생기지 않아 많이 아쉽기도 하다"고 했다. 지인인 오모(여·53)씨는 "그가 퇴임 후 '재직 당시 연대 교수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왔다, 퇴임하면서 학교와 학생들로부터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해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최근엔 매일 소주 한 병씩 마신다고 들었다. 지난달 31일 마씨를 만났는데 '내 인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며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솔직해지는 걸 보고 싶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장 최근인 지난 1월에도 시집 '마광수 시선'을 내며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올해 초 중앙선데이에서 연재하는 '김동률 서강대 교수의 심쿵 인터뷰'에서 "난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회한 가득한 본인의 인생을 되돌아봤다.


그는 "문학도 인정받지 못했고 학계나 문단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다"며 "한 많은 인생이다. 하루 종일 멍하니 지낸다. 같이 살던 어머니마저 연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넓은 아파트에서 덩그렁 혼자 산다. 말 상대도 없다. 몹시 우울하고 외롭다. 여자친구가 너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즐거운 사라'라는 작품을 왜 내놓게 되었냐고 김 교수가 질문하자 마 전 교수는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우리 사회의 행태에 시비를 걸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주위를 둘러보라. '섹드립(섹스에 관한 애드리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라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슬퍼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도 했다. "난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됐고 교수가 됐다. 윤동주처럼 멋진 시인이 꿈이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나를 변태, 색마, 미친 말(광마)로 기억할까 두렵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마광수 시선'을 붙들고 창작욕을 불태웠다. 끝까지 사회의 냉혹한 시선과 맞섰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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