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화계 원로 김기덕 감독이 7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계 관계자에 따르면, 김기덕 감독은 이날 오후 3시 2분께 폐암으로 숨졌다고 한다.
김기덕 감독의 삶은 그야말로 영화로 시작해 영화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1년 영화계에 데뷔한 김기덕 감독은 1977년 영화산업에서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쏟아냈는데, 영화계에선 이 시기 그를 한국 영화의 흐름을 바꾼 젊은 감독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61년, '5인의 해병'으로 데뷔한 김기덕은 한국 장르 영화의 포문을 열며 당대 영화계를 이끈 인물이다. '5인의 해병(1961)'으로 흔치 않은 전쟁영화를 각인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아직도 수많은 영화학도들이 보는 일종의 '텍스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기덕은 청춘 영화의 효시인 '맨발의 청춘'(1964), 국내 최초의 야구 소재 영화 '사나이의 눈물'(1963),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성인 코미디 '말띠 신부'(1966) 등을 연출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역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1964)'이다. 당시 가장 독특하고 성공적인 장르가 멜로드라마였는데 '맨발의 청춘'이 그 중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기덕 감독은 1967년 SF 괴수영화의 시초 '대괴수 용가리'로 한국 장르영화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밖에도 '모란이 피기까지는(1962)'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섬마을 선생(1967)' 등 한국의 정서와 시대상이 담겨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을 다수 남겼다.
198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영화에 대한 끈을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연윤리위원회 영화·비디오 심사위원을 비롯해 대종상 집행위원과 심사위원장, 서울예술대학 학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며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2011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그의 회고전이 마련돼 모처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당시 가졌던 언론 인터뷰에는 김기덕 감독의 삶과 철학, 영화에 대한 열정 등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당시 김기덕 감독은 "제작 현장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는데 명함에는 여전히 영화감독이라고 적혀있다. 영화를 통해 나는 교수와 대학 학장을 했다"며 "그렇기에 나의 뿌리는 영화이고, 나는 죽어서도 영화감독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함축적으로 풀어낸 명언이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는 권력자들이 문화를 점령했던 안타까운 시절을 안고 있다. 영화계에는 그 시대에 대한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신구와 좌우의 갈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며 쓴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김기덕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원수처럼 지내면 되겠느냐.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듯 선배는 후배가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후배는 선배를 예우하는 게 바람직한 모습이다"라고 의미 있는 말을 전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9일 오전 11시다
김기덕의 부음이 세간에 전해지며 현재 온라인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누리꾼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최수정 인턴기자 soojung@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