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증언' 출간...“신군부, 최규하 대통령 체포 시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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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증언' 출간...“신군부, 최규하 대통령 체포 시도 했었다"
  • 성기노
  • 승인 2017.09.2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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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을 축으로 한 신군부가 10·26 사태(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과도 정부를 이끌고 있던 최규하 전 대통령도 체포하려 했다는 증언이 9월 20일 나왔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장남인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전 국무조정실 정책조정차장)은 부친의 생전 증언을 엮어 이날 발간한 저서 ‘신현확의 증언’(사진)에서 “한때 신군부가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설’이 시중에 돌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판단할 만한 일이 있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군부가 10·26 사태 수습 과정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전권을 장악하려는 것을 방조했다는 죄목으로 최 전 대통령을 체포하려 했으나, 신 전 총리가 “헌법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을 누가 무슨 권한으로 체포한다는 말이냐”며 단호히 반대했다는 것이다.


신 이사장은 신군부가 최 전 대통령 대신 신 전 총리를 대통령으로 세우려 했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신 이사장은 “한번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아버지에게 ‘총리님이 대통령을 맡아주셔야 되겠다’고 대놓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며 “아버지는 ‘네가 뭔데 일국의 재상에게 대통령을 맡으라 마라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전했다.


신 이사장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이 1980년 4월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면서부터 신군부가 독자 집권에 박차를 가했으나,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자신을 지지하는 것으로 착각해 사퇴를 거부하다 거듭된 압박에 결국 사퇴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고비마다 신 전 총리에게 자문했다고 신 이사장은 기술했다.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을 때 노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제언하고, 1990년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의 3당 합당을 제언한 것도 모두 신 전 총리였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9년 이른바 ‘중간평가 공약’에 대비해 재벌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아 뒀으나, 공약 이행이 무산되자 자금 처리 방안도 신 전 총리에게 물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2007년 4월 26일 타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대구경북의 대부였다. 한국 보수층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군부 시절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과 함께 '김종필만은 안 된다'고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 권력의 공백기에 김종필을 견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두환과의 권력투쟁에서 완패했다. 그래서 그의 '증언'이라는 책도 당연히 신군부와의 대척점에서 시종일관 쓰여 있다.


그는 제1공화국 탄생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관·재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증인이었다.


1979년 12·12 당시 최규하 대통령 대행이 신군부에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 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1980년 '서울의 봄' 때는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가결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신 전 총리는 전문 경제관료로는 누구보다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 39세의 나이에 부흥부 장관(경제기획원의 전신)에 오르는 등 여섯 차례에 걸쳐 장·차관을 지냈다.


관가에서 물러난 뒤에는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평가에 걸맞게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를 이어 나갔고 196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화려한 인생은 해방 전부터 시작됐다.


1920년 경북 칠곡 출생인 그는 어릴 때부터 경북·대구 지역의 '신동'으로 불렸다.


경북고 전신인 대구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현재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에 합격,한국인 고시 합격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 3년을 보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임용된 뒤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1959년 만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부흥부 장관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재계에 몸을 담았던 그가 다시 관계에 복귀한 것은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1973년 9대 총선이 계기였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았고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국무총리를 맡은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의사를 표현해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다.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거나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 차지철 경호실장(왼쪽)과 신현확 경제부총리(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그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6년에는 삼성물산 회장 직을 맡아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8년에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 추진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한때 박근혜 캠프 원로자문그룹으로도 등록하는 등 말년까지 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신군부에게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는 신현확 부총리가 더 부담이었을 것이다.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정치적 기반이 탄탄했던 신 부총리가 조직적으로 신군부에 대항할 경우 상당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정보를 장악하긴 했지만, 정재계에는 거의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신 부총리의 경우 양김의 대안세력으로 집권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결국 그들은 '무력' 앞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전두환 노태우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이런 정치적 상황이 그 근거가 된다. '신현확의 증언'은 신군부의 무력 집권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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