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0여년 전 통일신라 도읍 경주의 왕족, 귀족들이 용변을 보던 수세식 화장실터가 처음 세상에 나와 화제가 되고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옛 신라연못인 월지(안압지·국가사적)와 옛 동궁터(왕태자가 머물던 거처) 영역의 북동쪽 구역을 최근 발굴한 결과 당시 궁궐의 수세식 화장실터와 대형 배수시설 등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연구소 쪽 자료를 보면, 이 수세식 화장실터는 7.4평 넓이의 전체 건물터와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이 온전히 갖춰진 모습으로 드러났다. 초석 건물터는 변기가 있는 구역과 배수로와 전돌만 깔린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변기 구역은 화강암으로 만든 변기 구조물이 있고, 변기를 통해 배출된 오물이 잘 흘러나가도록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 땅 밑에 고랑을 파 물을 빼는 시설)를 판 얼개다.
변기 구조물의 경우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는 발판(판석)이 각각 있는 2개의 돌판을 맞물리게 한 얼개의 결합식 변기와 한 개의 돌판에 타원형 구멍을 뚫은 단독 변기석조물이 따로 출토돼 눈길을 끈다.
발굴 당시 결합식 변기는 원래 붙어 있던 2개의 돌판이 각기 따로 떨어진 채 후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단독변기 위에 놓여 있었다. 나중에는 따로 분리돼 발판 용도로 재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배수로와 전돌이 깔린 구역은 화장실의 전실로 일단 추정하지만, 정확한 공간적 기능은 명확하게 판명되지 않은 상태다.
연구소 쪽은 이 유적이 격식을 갖춘 신라 궁궐의 고급 화장실로, 변기에 물을 흘리는 수세식 구조를 통해 오물이 변기 아래 암거를 통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물을 유입하는 설비가 따로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조사돼 항아리 등에서 물을 떠서 오물을 씻어 내보내는 방식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시설 바닥에는 타일 구실을 하는 전돌(쪼개어 만든 벽돌)을 깐 자취도 확인돼 통일신라 왕궁에서 최상위 계층이 쓴 고급 화장실의 생생한 얼개를 알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경주와 익산 등지에서 고대 화장실 유적이 출토됐다. 익산 왕궁리에서는 7세기 배수저류식 화장실 유적과 뒤처리용 나무 막대기가 나왔으나, 석조 변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 경주 불국사에서는 8세기에 제작된 변기형 석조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화장실 유적 외에도 남북 길이 21.1m, 동서 길이 9.8m로 추정되는 대형 가구식(架構式) 기단 건물지가 확인됐다. 가구식 기단은 석재를 목조가구처럼 짜 맞춘 기단을 말한다.
이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왕경 도로와 맞닿아 있고, 건물지 규모에 비해 넓은 계단시설이 있어 그간 경주 동궁에서 나오지 않았던 출입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과거에 안압지로 불린 동궁과 월지(月池)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 조성됐다. 1975년 조사에서 인공 연못과 섬, 건물지가 발굴됐고 유물 3만여 점이 출토됐다. 2007년부터는 동궁과 월지 북동쪽에서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발판과 구멍 달린 변기, 배출배수시설 등이 함께 붙은 화장실 유적의 전모가 온전히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 연구소의 박윤정 연구관은 “현재까지 조사된 통일신라 시대까지의 고대 화장실 중 가장 고급스런 유형으로 볼 수 있다”며 “신라 왕실 화장실 문화의 구체적인 면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활사적 가치가 지대하다”고 설명했다.
연구소 쪽은 이와 함께 발굴 현장 동쪽에서 동궁과 월지의 동문으로 추정되는 대형 가구식 기단 건물터, 창고시설, 우물터 등도 찾아냈으며, 토기 등 다량의 생활유물들도 수습했다고 덧붙였다.
60평이 넘는 대형건물터인 동문 추정터는 월지·동궁터에서 처음 확인되는 출입문 유적으로 동궁터 전체의 규모와 영역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해석된다.
한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 가운데에도 가끔 배관까지 잘 설치된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되고는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걸상식의 수세식 변소를 사용했던 사실이 홈페이 및 그 밖의 로마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단지 발달한 수도 시설을 활용하여 좌식 변기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성벽 속에, 또는 걸상식의 변기를 성벽에 매달고 배설물이 성벽 밑으로 흐르는 하수와 함께 성벽 밖으로 흘러나가게 했다. 근세인 18세기 초에 이르러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걸상식의 수세변소를 설치하였으나, 주로 사용된 것은 역시 걸상식 변기였다.
걸상식 변기의 설치와 제작이 아주 까다로워서, 그나마 일반 서민이 체면치레를 하면서 집안에서 용변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요강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배설물이 담긴 요강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당시에는 쓰레기 폐기에 관한 시민 의식이 없었던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요강 속의 배설물을 자기 집 창밖으로 비웠다. 마치 화병에 담겨 있는 물을 버리듯, 창문을 통해 거리로 유유히 요강을 비우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집집마다 그랬다.
그래서 프랑스의 경우에는 'Garw l`eau(창밖으로 버려지는 오물을 조심하라)'라는 경고의 말까지 나돌 지경이었다. 아마도 갑자기 쏟아지는 배설물에 봉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여겨지던 중세 유럽에서도 이렇게 미개한 화장실 문화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조상들은 '양반'이었다.
임석우 인턴기자 rainstone@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