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지난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암살된 직후, 아들 김한솔(22) 측이 여러 국가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일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김정남의 둘째 부인 이혜경과 자녀 김한솔·솔희 남매의 피신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천리마 민방위’ 관계자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당시 마카오에 머물고 있던 가족들은 김정남 피살 직후 천리마 민방위와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천리마 민방위 관계자는 “몇몇 국가들에 이들의 보호를 요청했지만 실망스럽게도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미국 중국 네덜란드는 도움을 제공했지만,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은 신변 보호 요청을 거부했다고 덧붙였다.
캐나다의 경우 북한에 억류됐다가 지난 8월 풀려난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의 석방 협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해석했다.
앞서 ‘천리마 민방위’는 지난 3월 홈페이지를 통해 “긴급한 시기에 한 가족의 인도적 대피를 후원한 네덜란드 정부, 중국 정부, 미국 정부와 한 무명의 정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밝힌 바 있다.
피신 과정에서는 대만 타이베이 공항을 최초 경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관계자는 “최종 목적지의 입국사증(비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긴장 속에 30여 시간을 타이베이 공항에서 보냈다”면서 “피신 과정에서도 몇몇 단체들의 방해 시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김정남 피살 직후에 아들 김한솔 역시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김한솔의 당시 최종 목적지는 물론, 현재 은신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김한솔 등 가족들은 대만을 거쳐 현재 제3국으로 피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신을 도운 탈북지원단체 ‘천리마 민방위(CCD)’ 관계자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긴박했던 대만 공항에서의 30시간 등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WSJ에 따르면 김정남 암살 사건 당시 마카오에 살고 있던 김한솔은 자신이 다음 암살 타깃이 될 것으로 우려하고 CCD 측에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 영화를 방불케 하는 도피 작전이 시작됐다. 마카오로 추정되는 출발지에서 제3국으로 행선지를 택한 일행은 대만 공항을 경유했다.
김정남의 둘째 부인 이혜경 씨와 김한솔, 솔희 남매는 최종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입국사증(비자)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고, 긴장 속에서 30여 시간 동안 타이베이 공항에 머물렀다. CCD 측은 왜 30시간 넘게 타이베이에 발이 묶여 있었는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지만 “김한솔의 피신을 방해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고 주장해 북한 측의 외교적 방해 공작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CCD는 이들의 도피 과정에서 몇몇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캐나다 등이 신변 보호 요청을 거부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공개했다. WSJ는 캐나다 사정에 정통한 취재원을 인용해 “캐나다가 이 요청을 거부한 것은 북한에 억류됐다 8월에 풀려난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캐나다 정부는 임 목사를 석방시키기 위해 북한 당국과 물밑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김한솔의 도피를 돕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캐나다 측은 이에 대해 “임 목사의 석방은 우리 외교와 협상의 결과”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CCD는 김한솔의 비자 문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도 도움을 준 나라들이 있었다며 미국 중국 네덜란드를 언급했다. 앞서 CCD는 3월 김한솔이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고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알리면서 “긴급한 시기에 한 가족의 인도적 대피를 후원한 네덜란드 중국 미국 정부와 ‘한 익명의 정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밝힌 바 있다.
WSJ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국가에 문의했지만, 중국은 “관련 정보가 없다”고 답했고 미국과 네덜란드는 답변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한 익명의 정부’는 이번에도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다. 김한솔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CCD 측은 “구체적인 탈출 경로와 최종 정착지 등은 밝힐 수 없다”며 “국제사회가 김한솔의 신변 안전에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마카오와 유럽 등 해외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김한솔은 자신의 작은아버지 김정은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등 북한 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그는 보스니아 국제학교 재학 시절인 2012년 핀란드 TV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어떻게 김정일의 후계자가 됐느냐’는 질문에 “그(김정은)가 어떻게 독재자가 됐는지 모르겠다”며 김정은을 ‘독재자’로 칭했다. 또 “언젠가 북한에 돌아가 주민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고 싶다”는 발언도 했다.
‘백두혈통’의 일원인 김한솔이 늘어놓는 북한에 대한 비판은 김정은 정권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우드로윌슨센터의 패트릭 매커천 연구원은 “김정은은 리더십 확보를 위해 자신의 혈통을 강조해 왔고, 이 과정에서 위협이 되는 가족 구성원들은 배제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치명적인 신경작용제(VX)를 김정남의 얼굴에 발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외국인 여성 2명은 2일 말레이시아 고등법원에서 범행 8개월 만에 열린 첫 재판에 출석했다.
피고인인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25)와 베트남 국적인 도안티흐엉(25)은 몰래 카메라 쇼를 위해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김정남을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날 재판에는 화학무기 공격을 받은 김정남을 공항 내 진료소로 안내한 현지 경찰관 및 안내센터 직원과 진료소에서 근무하던 의사와 간호원 등 4명이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첫 증인으로 나선 모흐드 줄카르나인 사누딘(31) 일경은 "통통한 얼굴의 살찐 남성이 안내센터 직원과 함께 와서 여성 두 명이 얼굴에 뭔가를 발랐다며 신고를 하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액체가 조금 묻어 있었고 눈이 조금 충혈돼 있었다"면서 김정남이 일단 치료부터 받고 싶어 해 공항 내 진료소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피습 장소에서 공항내 진료소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긴 편이 아니지만 김정남은 "천천히 걸어달라. 눈이 흐려져서 앞을 볼 수가 없다"고 말했으며 "진료소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실시했다"고 모흐드 일경은 전했다.
결국 김정남은 피습 후 약 20분 만에 사망했다.
김정남을 처음 치료했던 의사인 닉 모흐드 아즈룰 아리프 자야 아즐란과 간호사 라비아툴 아다위야 모하마드 소피는 김정남이 자신들의 질문에 응답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고 말했다.
닉은 "(처음) 봤을 때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눈은 꽉 감은채였고 벌개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면서 김정남이 곧 이를 악물고 눈이 뒤집히는 등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김정남은 직후 의식을 잃었고 진료소에 들어올 당시 매우 높은 수준이었던 혈압이 최고 70 최저 40까지 급락한 뒤 맥박이 끊겼다.
하지만 시티 아이샤의 변호를 맡은 구이 순 셍 변호사는 "아이샤는 김정남의 얼굴에 바른 물질이 독이란 걸 몰랐다. 그녀 역시 이번 사건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시티 아이샤는 올해 초 북한 국적자 리지우(일명 제임스·30)와 홍송학(34)에 의해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 포섭됐다.
중국시장 판매용 TV 리얼리티쇼 제작자인 '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홍송학은 수차례 예행연습을 시킨 뒤 2월 13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공격하라며 시티 아이샤의 손에 VX 신경작용제를 발라줬다고 구이 변호사는 말했다.
국가정보원은 홍송학을 북한 외무성 소속 요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오종길(55), 리지현(33), 리재남(57) 등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범행 당일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했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기소장에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이 다른 공범 4명과 함께 김정남을 살해할 공동의 의사를 갖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기재했으나 이들의 신원을 적시하지는 않았다.
변호인들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검찰이 공범들의 신원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지우 등 다른 북한 국적 용의자들은 치외법권인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숨어 있다가,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내 말레이시아인을 전원 억류해 인질로 삼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굴복한 3월 말 출국이 허용됐다.
이와 관련,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의 모국인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선 말레이시아가 북한 정권과 타협을 하는 바람에 '깃털'에 불과한 여성 피고들만 희생양이 됐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경우 사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한 말레이시아 현지법상 유죄가 인정될 경우 두 사람은 교수형에 처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검찰과 변호인단은 향후 두 달 이상의 기간에 걸쳐 진행될 이번 재판에 국내외 전문가 등 153여 명을 증인으로 세울 예정이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