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사라는 초대형 뇌관이 터졌다. 검찰은 지난 10월 31일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안봉근 이재만 씨를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뇌물로 받은 혐의가 있다며 전격 체포했다. 또 국정원장을 지낸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씨의 자택과 개인사무실도 압수 수색했다.
‘초대형’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국정원 특수활동비의 성격에 있다. 연간 5000억원 가까운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정보 수사 활동 등에 집행하는 예산이다. 현금으로 쓰고 사용 내역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깜깜이 예산'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비밀활동비’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보안사항 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용인하는 것이다. 그동안 예산을 감시하는 국회에서 이 국정원 특수활동비 내역에 대해 수차례 지적과 감사 요구를 했지만, 일종의 ‘성역’으로 남아 있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는 국정원 설명 앞에 ‘국민의 공적인 감시 체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검찰이 건드린 것이다. 검찰이 청와대 관계자들의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수를 본격 수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에서는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각 부처마다 ‘숨어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비밀 정보업무와 관련된 사안이라는 이유로 명백하게 그것이 밝혀진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 검찰이 다른 일반 부처도 아니고, 청와대로 통하는 국정원 특수활동비에 ‘손을 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두 가지의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먼저 문재인 정부와 검찰이 ‘위험한 도박’을 벌이고 있다는 부분.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정부 부처 등에 지원하는 일은 과거 정권 때도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뇌물죄로 처벌한다면 어느 정권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특히 참여정부 때도 이런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와 같은 민감한 사안을 알 만한 핵심요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당에서넌 벌써부터 ‘진정한 적폐를 가려보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정원이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현행법에 어긋나지만 발본색원하려면 역대 정부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바른정당 오신환 의원도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한다"며 "(노무현 정부의) 김만복 전 국정원장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전직 국정원 간부의 말을 빌려 "과거엔 국정원 간부가 매월 1일 청와대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수십 년 전부터 있던 잘못된 관행"이라며 "그러나 옛날엔 실장이나 수석들에게 갔는데 비서관에 불과한 안봉근 이재만씨에게 준 것은 좀 의아하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국정원 돈’은 권력형 비리에 어김없이 등장하곤 했다. 과거 정치권 등으로 흘러들어간 사례는 역대 정부 때도 있었다. 2001년 대검 중수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 김홍업씨를 수사할 때 임동원 신건 국정원장이 3500만원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검찰은 국정원장들이 '개인 돈으로 떡값을 준 것'이라고 서면조사에서 해명하자 더 문제 삼지 않았다. 2004년 대선 자금 수사 때는 권노갑 씨에게 10만원권 국정원 수표가 일부 흘러들어간 것으로 드러났지만 국정원 등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본류'가 아니어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게 당시 검찰의 설명이었다.

이렇듯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검찰이 규명하려고 할 때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현 정권 인사들도 ‘걸려들’ 가능성이 있다. 검찰이 수사목적으로 옛날 ‘자료’들까지 파헤친다면 공개가 되지 않더라도 현 정권의 아킬레스 건 하나를 검찰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에선 국정원에 예산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고, 국정원 역시 특수활동비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커서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 전 원장은 "국정원 내부엔 해당 직원이 어떤 이유로 얼마의 돈을 썼는지 다 기록된 자료가 있다. 다만 비밀 유지가 필요해 국회 정보위 등에 알릴 때는 '해외 정보 활동'처럼 축약해 보고한다. 특정인이나 기관에 국정원 돈이 현찰로 전용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수사 형평상 차원에서 검찰이 어떤 식으로든 노무현 정권 때의 '관행'도 참고 삼아 들여다볼 가능성이 있다. 김 전 원장의 '말'도 그 과정에서 검증이 될 것이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이번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사를 ’자신의 팔을 내주고 상대의 목을 취하는’ 전략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 정권 초기에 정치자금 수사를 할 때 ‘우리는 야당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적폐’를 파헤칠 경우 현 정권보다는 박근혜 이명박 정권이 더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사를 전격적으로 결정했을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은 문재인 정권이 과거 오랫동안 ‘관행’처럼 여겨져온 모든 형태의 ‘특수활동비’를 이번 기회에 깨끗이 ‘정리’하기 위해 말 그대로 ‘적폐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말 청와대의 특수활동비를 '셀프 삭감’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2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올해 5월 현재 청와대 특수활동비와 특정업무경비 127억원 중 42%에 해당하는 53억원을 절감, 이를 청년 일자리 창출과 소외계층 지원 예산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또 공식행사를 제외한 가족식사와 치약·칫솔 등 개인 비품 구매비 전액을 사비로 처리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동안 일부 부처들이 관행처럼 특수활동비를 '쌈짓돈'처럼 써왔던 데 대해 경종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한국납세자연맹 측은 “특수활동비는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수사, 기타 이에 준하는 국정수행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라고 정의돼 있음에도 다른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특수활동비 편성내역 상의 항목은 명목적인 항목일뿐 실제적으로는 각 부처의 기관장들이 조직관리차원에서 급여성 활동비나 격려금, 퇴직위로금 등으로 전용해 왔다"며 "특수활동비를 사용할 이유가 없는 부처는 예산을 즉시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예산안에 이 특수활동비를 예전보다 18%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이 확인한 정부 특수활동비 집행 증비자료 구비 실태 확인 결과 절반이 미비한 상태라고 한다. 줄여서 3289억원 수준이라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이며, 전부가 국민혈세인 것이다. 그 돈이 권력자의 주머니에서 녹아 사라지지 않도록 엄격한 관리·감독의 방안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국가안보와 관련한 수사활동을 하는 것도 아닌 국회가 매년 80억 원이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특수활동비를 쓰는 것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 지난 5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국회 특수활동비 개혁을 제안한 바 있었으나 국회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국회부터 눈 먼 돈에 길들여져 있으니 개혁에 미적거리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검찰은 이렇게 ‘특수활동비’라는 적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개혁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리고 그 첫번째 타깃이 바로 안봉근 이재만 전 비서관이었다. 앞으로 이 과정에서 과거 모든 정부의 특수활동비 전용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탈탈 털어 관행을 끊어내자는 메시지가 강력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손도 베일 수 있는 위험한 칼이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