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사건의 ‘최종 윗선’으로 지목됐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을 ‘주범’으로 적시했다. 그는 국정원장에게 직접 자금 상납을 요구해 두 차례에 걸쳐 총 4억원을 수수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특활비 수수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의 칼날이 이 전 대통령을 직접 겨누게 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송경호)는 5일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을 재판에 넘기면서 이 전 대통령을 뇌물 수수 및 국고 손실의 ‘주범’으로, 김 전 기획관을 ‘방조범’으로 적시한 공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김 전 기획관은 특활비 상납 과정에서 중간 전달자 역할을 했을 뿐 국정원 자금을 수수한 것은 이 전 대통령이라는 의미다. 이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국정원 특활비 상납 사건의 핵심 피의자가 됐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4~5월, 2010년 7~8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김성호·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뇌물 상납을 요구했다.
두 명의 국정원장은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예산관을 통해 김 전 기획관에게 2억원씩 총 4억원을 전달했다. 2008년엔 1만원권 현금 2억원을 여행용 캐리어에 담아, 2010년엔 5만원권 현금 2억원을 쇼핑백 2개에 나눠 담아 청와대 근처에서 은밀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이 전 대통령은 두 국정원장에게 돈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김 전 기획관에게 “국정원에서 돈이 올 것이니 받아둬라”고 직접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전 대통령이 국정원에 상납을 요구한 최초 지시자이면서 동시에 돈을 건네받은 최종 수수자라는 게 검찰 측 설명이다.
김 전 기획관 또한 검찰 조사에서 “이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정원 돈을 받았을 뿐 개인적으로 착복한 사실은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또 이 전 대통령이 “국정원 기조실장과 독대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김주성 전 국정원 기조실장은 2008년 5월 청와대에 특활비 2억원을 전달한 뒤 이 전 대통령과 독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에 따르면 김 전 기조실장은 이 자리에서 “국정원 돈 전달이 문제될 수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며 추가 상납을 만류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이 국정원 특활비 수수의 불법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검찰 관계자는 “사건 관계자 중 돈을 전달하거나 받은 것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국정원 특활비를 수수하고 사용한 것과 관련해선 이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 현재 검찰의 결론”이라고 말했다.
중간 전달자인 김 전 기획관이 재판에 넘겨짐에 따라 검찰 수사는 ‘몸통’으로 지목된 이 전 대통령을 향하게 됐다. 검찰이 당장 직면한 과제는 이 전 대통령 측이 특활비를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특활비를 상납하게 된 경위에 대해 “청와대 기념품 관련 비용이 모자라 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해 국정원 자금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특활비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국가를 위한 통치자금’ 성격으로 특활비를 상납했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논리다.
하지만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특활비를 기념품 구입 등이 아닌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국고 손실과 뇌물죄는 돈을 수수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범행이 완성되는 혐의다. 하지만 사용처 또한 수사의 중요한 부분이라 보고 있고, 향후 충분한 검증과 보강 수사를 통해 밝혀나가겠다”고 말했다.
검찰이 이 전 대통령을 ‘주범’으로 적시할 수 있었던 것에는 오랜 측근인 김백준 전 기획관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애초 김 전 기획관은 "돈을 받은 기억 자체가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최근 들어 기존의 태도를 바꿔 "이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국정원에서 돈을 받았고, 이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장관들에게 나눠줬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 4억원의 국정원 특활비를 수수한 혐의로 구속된 김 전 기획관은 개인적으로 돈을 쓰지 않았다고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김 전 기획관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전 대통령은 적어도 4억원대 뇌물수수의 공범이 된다.
앞서 또 다른 측근인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국정원에서 10만달러(약 1억원)를 받아 김윤옥 여사 측에 전달했다고 진술한 데 이어 김 전 기획관까지 관련 진술을 내놓으면서 이 전 대통령은 검찰의 직접조사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 전 대통령으로서는 핵심측근들의 잇단 ‘배신’으로 점점 사면초가로 빠져들고 있다. 김 전 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의 금고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란 게 일반적 예상이었다. 하지만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압박 등으로 형량 감량을 위해 이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언을 결정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MB) 전 대통령 측은 5일 이 전 대통령이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의 주범이라는 검찰 수사에 대해 “사실관계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지만, 그 절차와 법적 논리에서도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 전 대통령 비서실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거듭 밝히지만 이 전 대통령은 국정원 특활비와 관련해 그러한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서 “일반 형사 피의자라도 그럴 수 없는 것인데 관련 당사자들의 진술도 엇갈리는 상황에서 확인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주범이라고 규정한 것은 모욕을 주기 위한 전형적인 짜 맞추기 수사”라고 비판했다.
검찰의 이런 조사 결과에 대해 이 전 대통령측은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 꼭 와 달라고 신신당부했다’며 초청장을 보내면서, 뒤에서 검찰은 별다른 근거 없이 ‘주범’으로 전직 대통령을 망신주고 있다. 어르고 뺨 때리는 격”이라며 “이렇게 우롱당하면서 평창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참석하는걸) 제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참모진 사이에) 팽배하다”며 계속 반발하고 있다.
검찰의 이 전 대통령 ‘주범’ 적시는 그동안의 조사를 통해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 대통령측이 정치적으로 반발을 하고 있지만 김백준 전 기획관의 증언이 상당히 구체적이기 때문에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이 전 대통령측이 평창올림픽 보이콧 운운하는 것은 그만큼 검찰의 수사가 강도높게, 그리고 적확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