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식 판사의 오판...박근혜 겁박에도 이재용은 모든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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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식 판사의 오판...박근혜 겁박에도 이재용은 모든 것을 얻었다
  • 성기노
  • 승인 2018.02.0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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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본다. 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 또 한 사람은 이건희 회장을 아버지로 둔 자식들이다. 태어나서부터 주변의 온갖 떠받듦에 살았을 것이고, 특권의식이 몸에 배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수많은 정보의 조합을 통해, 무엇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그를 불러 청와대에서 밀담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두 사람밖에 모른다.


하지만 몇 마디의 대화 속에서 재벌총수는 대통령의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다. 춤을 추라면 춤이라도 추었을 정도로 그 독대 자리는 재벌총수에게 큰 기회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에서 정형식 판사는 그 장면을 ‘대통령이 재벌총수를 불러 일방적으로 겁박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치를 알았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불법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교도소에 가지 않는지부터 보고 자란 사람인데, 그 장면에서 재벌 총수는 대통령에게 겁박을 받고 그 협박에 못이겨 돈을 준 것일까.


아니면 ‘옳거니 이제 입질이 왔구나’ 하면서 대통령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퍼주었을 것일까.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통령이 겁박해서 재벌총수에게 뇌물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뇌물을 준 공여자 재벌총수는 죄가 없다는 논리는, 한국 정치의 정서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억지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수십년 법만 다뤄온 판사 입장에서는, 오로지 법대로만 생각했을 때 겁박에 못이겨 돈을 준 사람은 죄가 없고, 받은 사람만 파렴치한으로 봤다.



▲ 이재용 부회장의 어린 시절 모습이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8월 1심에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 등이 대부분 인정돼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지 5개월여 만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선고 결과는 그와 함께 ‘국정농단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선고에도 직결된다. 박 전 대통령은 항소심 선고 전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에 이 부회장의 선처를 원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이 석방되면서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탄원처럼 선처가 이뤄진 셈이 됐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이 선처 때문에 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정경유착’이 아닌 ‘최고 권력자의 뇌물 요구 사건’ ‘대통령이 기업을 겁박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부회장보다 박 전 대통령에게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이 부회장의 선처를 원한다’는 탄원서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자필로 쓴 A4 용지 4장 분량의 탄원서에는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 문제가 이 사건은 물론, 자신과도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특검의 ‘짜맞추기’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A4 용지 4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 것이다.





그러면서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이 부회장과 삼성 전·현직 임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내려진 판결이 박 전 대통령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게 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농단의 주역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이고 이들의 요구에 응한 이 부회장은 피해자의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재벌의 자본권력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대한민국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가장 덩치큰 포식자를 피해자로 규정한 것이다. 삼성이 잡아먹힐 것이라고 재판부는 생각한 모양이다.


재판부는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모습은 이 사건에서 볼 수 없다”며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배경으로 뇌물을 요구한 ‘요구형 뇌물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 부회장 측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 뇌물공여로 나아갔다”는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것이다.


이 부회장은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기는커녕 오히려 몇 배 더 많은 뇌물을 직.간접적으로 건넸을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공무원으로부터 돈을 먼저 요구받으면 뻔한 이야기인데 그것을 마다할 비즈니스맨이 있겠는가. 특히 그 공무원이 대통령이었다면. 교도소를 각오하고서라도 그 요구에 친절하고 세심하게 응했을 것이다.


재판부가 판단한 사건의 기본 성격이 달라지면서 1심의 유죄 판결 혐의들이 대거 무죄로 바뀌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36억원을 뇌물공여로 인정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받은 뇌물이 된다. 89억원을 뇌물로 인정한 1심에 비해 대폭 줄어든 규모지만 2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를 강하게 질타했다.


재판부는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이 삼성 경영진을 겁박했다”며 “우리 법률은 수수자인 공무원에게 더욱 무겁게 책임을 묻고 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죄를 덜어주는 대신 박 전 대통령에게 훨씬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공여는 최대 징역 5년에 처해지지만 뇌물수수는 5억원 이상일 경우 최대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현재 롯데·SK·삼성에 592억원을 요구하거나 수수한 혐의로 기소돼있는 박 전 대통령의 경우 무기징역까지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국정농단 재판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 등 항소심은 1심과 달리 박 전 대통령을 공범으로 적시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353일 교도소 체험을 통해 모든 것을 얻었다. 삼성의 최대 현안이었던 경영권 승계는 합법적으로 면죄부를 받았고 이렇게 그 논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포괄적 현안인 ‘승계작업’ 및 이와 관련한 묵시적 부정 청탁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제3자 뇌물 혐의에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연금공단의 삼성 합병 찬성이 ‘(청탁을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로 진행됐다고 본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소심 판결은 물론 ‘이재용의 지배력 확보에 유리한 영향을 미쳤다’는 재판부 스스로의 판단과도 배치된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이 미래전략실 주도하에 지속적으로 추진됐고,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승계작업을 서둘러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경영권 승계작업의 존재를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아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에 따라 승계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도 존재할 수 없어 제3자 뇌물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승계작업이 있었더라도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명시적으로 청탁하지 않았고, 박 전 대통령도 삼성 경영권 승계 문제에 대해 인식할 수 없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 역시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재용의 승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된 승계 문제 보고서는 작성자들의 의견서에 불과”하고 “보고서만으로 삼성이 승계작업을 추진했음을 직접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청와대는 정보의 총 집결지다. 경제 핵심참모가 대한민국 최대 기업의 경영권 승계 동향에 대해 보고한 것을 ‘작성자들의 의견서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 정형식 판사의 판단이다.


분초를 다투며 일하는 청와대 참모들이, 그 어려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독대 시간을 할애해 보고한 것이 작성자들의 개인 의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믿으라는 것이다. 거짓을 반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진실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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