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전사]유신 최후의 만찬, 김재규의 박정희 총격은 망상이 빚은 ‘촌극’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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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사]유신 최후의 만찬, 김재규의 박정희 총격은 망상이 빚은 ‘촌극’ 규정
  • 성기노
  • 승인 2018.10.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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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전인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총소리이자, 전두환 군사정권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남긴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이때를 ‘운명의 시각’으로 표현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0·26’의 전말을 신군부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김재규의 과대망상이 빚은 촌극’이라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수사결과 발표를 따르면서, 박정희 체제가 스스로 불러온 어둠의 결과라고 내비치는 식이다. 5공화국의 정당화를 위해 ‘구체제’로서의 유신을 강하게 비판한 맥락과 통한다.


<5공 전사>는 본문 2편에서 ‘10·26사태 전모’를 정리했다. 사건 전후 청와대와 대통령 측근들 사이의 상황, 대통령의 마지막 하루, 궁정동 참사 등을 218쪽에 걸쳐 실었다. 대체로 10·26을 수사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의 ‘국헌문란기도: 박 대통령 시해사건’ 문건과 수사결과 자료를 참고해 기록했다.


‘최후의 만찬’이 시작된 것은 사건 당일 오후 6시5분쯤이었다. 만찬장에는 박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참석했다.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김재규 중정부장은 부산시위 수습 문제로 박 대통령에게 질책을 들었다. 미리 섭외된 여성 2명이 들어오면서 화제는 전환됐다. 김 중정부장은 양주(시바스리갈) 칵테일을 만들다가 잠시 자리를 떴다. 자신이 초청해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를 만나기 위해서다.


오후 7시, 대화가 중정의 ‘신민당 공작’ 건으로 흐르면서 분위기는 더 경색됐다.


“신민당 공기는 어떻소?” 박 대통령의 물음에 김 부장은 “중도파가 강경하게 돌아섰다”며 부정적 상황을 전했다. 이때 차 경호실장이 끼어든다. “그까짓 자식들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뭉개 버리겠습니다!” <5공 전사>는 차 실장의 발언이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박 대통령이 이어 신민당 김영삼 총재 기소를 언급할 때도 김 부장은 “이중처벌은 곤란하다”는 뜻을 피력했다. “정보부가 그렇게 약해서 되겠냐. 죄가 있으면 딱딱 해치워야지 비행 서류만 가지고 있으면 무얼하나.” 박 대통령의 질책. 이어 차 실장의 강경 발언이 이어졌다.





김 부장은 다시 자리를 떴다. 그 길로 안가 본관 2층 침실 금고에서 권총을 꺼냈다. 뒤이어 부하인 박선호 의전과장과 박흥주 비서관에게 “오늘 내가 해치우겠으니 총성이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고 지시한다. “똑똑한 놈 3명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우겠다.” 거듭 지시한 후 그는 만찬장으로 돌아갔다. 만찬장에선 여성 가수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김 부장이 품속의 권총을 빼든 것은 오후 7시40분쯤이다. 앉은 자세로 차 실장에게 1발을 쏘고, 일어서면서 박 대통령에게 1발을 쐈다. 재장전하려 했지만 권총이 고장났다. 그는 일단 급히 현장을 떴다. 총성이 울리기 전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논란이 있다.


<5공 전사>는 이때 김 부장이 차 실장을 향해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발표한 수사결과대로다. 하지만 후일 동석한 여성 중 한 명은 “그런 발언은 없었다”고 밝혔다.


<5공 전사>는 오른쪽 팔목에 관통상을 입은 차 실장, 김 실장이 총에 맞은 대통령을 두고 피신한 것과 관련, “죽음 앞엔 평소에 견마지로의 충성을 맹세하던 경호실장과 비서실장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라고 적고 있다.


연회석의 총성은 아직 멎지 않았다. 고장난 총을 들고 뛰쳐나간 김 부장은 부하의 총으로 바꿔 돌아온다. 이어 피신했던 차 실장에게 다시 발사하고, 탁자에 구부리고 있던 박 대통령의 머리에도 1발을 재차 쏜 뒤 현장을 떠난다. 이때가 오후 7시43분이다. 18년5개월간 이어졌던 ‘박정희 통치’ 시대는 그렇게 예고 없이, 하룻저녁에 끝났다.


신군부의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은 사건의 원인과 인물평가 부분이다. <5공 전사>는 10·26을 ‘대통령을 살해하고 이를 혁명으로 이끌려 했던 김재규의 과대망상이 빚은 촌극’으로 규정한다.





사건 수사를 지휘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 “대통령으로는 자기가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사후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저지른 일이라고 발표한 수사결과를 요약한 문장으로 보인다.


다만 무엇이 박 대통령을 비극적 최후로 이끌었는가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 것이 눈에 띈다. <5공 전사>는 박 대통령이 측근세력의 ‘분할을 통한 통치’를 추구하면서 “결국 경호실장으로 대통령의 개인참모를 자처했던 차지철과 중앙부장 김재규 간의 알력을 심화시켜 경호실장에 대한 증오가 대통령에게까지 미쳐, 동료였으며 가장 믿던 측근의 한 사람인 김재규가 박 대통령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야기시켰다”고 해석했다.


박 대통령이 차 실장을 지나치게 신임한 점도 문제 삼는다. “경호실장 차지철의 단편적이고 편견 섞인 건의를 받아들여 필연적으로 중앙부장과 경호실장 간의 반목질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해 10월 대규모로 벌어진 부마 민주항쟁도 이유 중 하나로 든다. 부마 민주항쟁 수습 문제를 두고 “차지철과 김재규가 의견차 다툼 끝에 대통령을 살해하기에 이르는 10·26과 연결돼 한국 근대사의 한 시대를 마무리짓는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한다.





부마 민주항쟁에는 “불순배후조직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고도 적었다. ‘박정희 체제’ 이후 5공화국이 들어선 것을 ‘필연적 과정’으로 그리고자 한 만큼, 박 대통령 통치의 암흑이 이윽고 그를 덮친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인 것으로도 풀이된다.


김 부장, 차 실장, 김 실장 등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에 대해선 별도의 인물평을 곳곳에 기록했다. 군부 인사들의 평가를 더한 대부분이 ‘악평’이다.


김 부장을 “정신분열적 환자가 아니면 철저한 이중성격의 위선자” “참모들은 김재규가 명석하지 못했고 이재에 밝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이라고 적었다. 김 부장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박 대통령 살해 목적을 ‘유신체제 종식,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밝힌 데 대해서도 “긴급조치 10호를 건의한 자가 민주회복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썼다.


차 실장과 김 실장에 대한 평가도 박하다. 차 실장은 “박 대통령을 독재자이며 강경하고 자비심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 “국민과 대통령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어” “군의 간부로서 차 실장을 상관으로 모신 많은 사람들이 차지철을 굉장한 열등의식을 가진 인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김 실장도 “경력, 두뇌의 명석도, 활동력, 통솔력 등 어느 면으로 보나 비서실장으로 부적격”이라며 ‘무능력자’로 묘사했다.


두 군사독재정권이 지고 또 뜨는 시발점이 된 궁정동 안가 현장은 지금 기억에만 남아 있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궁정동 안가들을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토록 했다. 10·26 당시 연회석이 있던 안가 ‘나동’도 그때 헐렸다.


김재규 중정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총격은 사건 관련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서는 아버지 박정희의 심복이자 동료였던, 가장 믿을 만한 최측근의 배신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마항쟁 등으로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수많은 재야인사들에게는 박정희 피살이 한줄기 자유의 빛이었다.


어쨌든 유신은 가장 핵심내부의 배신으로 끝이 났고,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독재자 전두환의 5.18 진압으로 어두운 5공시절을 지나야 했다. 김재규는 박정희 총격에 대해 민주주의 질서를 회복하고 국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고 최후진술을 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진술은 진실된 것이었다. 박정희 일가가 보기에는 배신자였지만,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국민들에게는 그 시기를 앞당겨주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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